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멘트 애틀리 (문단 편집) === 노동당 당수 === 1935년 [[램지 맥도널드]] 내각이 붕괴되고 노동당이 야당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애틀리는 노동당의 당수로 취임하게 된다. 유럽 곳곳에 전운이 점점 짙어지는 당시 상황속에서 야당 지도자로 애틀리의 행보는 외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시기 애틀리는 [[국제 연맹]] 관할 하의 집단 안보를 주장하면서 볼드윈과 체임벌린 내각의 재무장 정책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히틀러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애틀리는 입장을 180도 전환해 정부의 재무장 정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애틀리 본인은 반민족주의•평화주의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정부의 재무장 정책을 반대했으나, 그에 앞서 철두철미한 반파시즘 성향을 갖고 있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스페인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한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격려 방문하기도 해서 해당 부대에 그의 이름이 붙기도 했고, [[뮌헨 협정]] 역시도 '히틀러의 야심에 굴복해서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이후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고 [[노르웨이 침공]]과 [[프랑스 침공]]으로 영국이 존망의 기로에 서자 애틀리는 보수당과 연정을 통해 이루어진 거국 내각에 부총리로 참여하게 된다. 전시 거국 내각 시기에 애틀리는 부총리로 내치를 담당하면서 전황과 외교를 담당한 윈스턴 처칠 수상을 훌륭히 보좌한다. 프랑스가 함락된 후,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나치와 협상할 것인지를 놓고 내각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는데 애틀리가 협상을 주장하는 노동당 장관들을 호되게 질책해서 처칠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 전쟁 초기 처칠과 거국내각을 가장 위태롭게 한건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드 우드]]를 위시로 한 보수당내 주화파들이였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애틀리와 처칠은 정치적으로 성향이 크게 달랐고 1945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남감에 따라 거국내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국민의 크나큰 지지를 받고 있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보수당 단독으로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제38회 영국 총선|1945년 7월에 총선이 치러진다.]] 선거 전에는 처칠의 지지율이 81%에 달했던만큼 보수당의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의 우세가 나타났다. 게다가 선거전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비해 원론적이고 거기서 거기인 애매모호한 정책만을 제시하며 상대적으로 노동당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선거 말미에 들어서 노동당의 대승이 예측되었으며, 선거 결과는 예측했던 것의 배 이상으로 노동당이 크게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당이 전체의 반도 안되는 197석이었던 반면, 노동당은 무려 393석을 차지한,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이러한 노동당의 압승 배경에는 애틀리가 공약으로 제시한 사회 복지 정책이 6년 넘게 지속된 전쟁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삶에 지칠대로 지친 영국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인기가 높던 처칠 대신 이전 보수당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의 실정을 지적한 노동당의 선거전략도 크게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영국인들의 기대를 가득 받은 채로 1945년 7월 26일 애틀리가 수상으로 취임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 [[윈스턴 처칠]]은 [[포츠담 회담|포츠담에서 트루먼, 스탈린과 같이 회의]]중이었는데 정권이 교체되어서 짐싸서 돌아와야 했다. 참고로 노동당 당수로서 처칠과 대립했던 시절에도 처칠과 개인적인 사이는 나쁘지 않았는지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예를 들어 [[영국 의회|의회]]에서 잠시 애틀리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사이 처칠이 들어왔는데, 일부러 애틀리에게서 가장 멀어진 소변기에서 오줌을 누자 애틀리는 "아니, 수상각하, 우리끼리 정치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럴 필요까지 있습니까?"라고 하자 처칠은 "오, 친애하는 클레멘트, 미안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감정에서 그런게 아니라, '''당신들([[사회주의자]])은 [[대물(신체)|큰 것]]만 보면 다 [[국유화]]하려고 들기 때문이오'''" 라고 응수한 적이 있다. 이후에도 처칠은 애틀리를 두고 "(내세울 것이 없으니) 겸허한 사람"이라고 비꼬아 칭찬하는 등[* "A humble man, then again he has much to be humble about"] 디스성 농담을 하곤 했으나, 진지한 석상에서는 그를 조용하지만 뜨거운 용기가 타오르는 신사이자 훌륭한 지도자라고 직설적으로 칭찬했다. 초강대국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서도 유년기의 한량아적 인배와 유머 감각, 다혈질 성격을 유지했던 처칠과 반대로 평생 겸허하고 차분하며, 남들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후대에서도 실제로 그 겸손하고 조용한 성격 때문에 업적이 묻혔다고 평가받을 만큼 범생이 타입이었던 애틀리의 성격 차이도 재미있는 부분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